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앙투안 공베르 (문단 편집) == [[순교]]와 기념 == [[1950년]]은 공베르 신부 형제의 사제서품 50주년(금경축)이자 한국 입국 50주년이었다. [[6월 25일]] [[서울]] [[혜화동]] [[가톨릭대학교/성신교정|대신학교]]에 여러 신부들, 당시 [[학생회장]]이었던 [[김수환]] 스테파노 추기경을 포함한 여러 신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성대하고 흥겨운 축하식이 열렸고, [[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]] [[인천]] 분원([[分]][[院]]) 지도신부로 있던 동생 줄리앙 신부도 참석하여 형 앙투안 신부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. 25세와 23세의 청년시절에 [[선교사]]로 한국에 왔던 공베르 형제 신부는, 이제 75세와 73세의 노인이 되어 있었다. 그런데 공베르 신부 형제를 위한 잔치가 열린 그날은, 하필 [[한국전쟁]]이 시작된 날이었다. 잔치가 거의 끝날 즈음에야 누군가가 “[[북한군]]이 [[38선]]을 넘어 남한을 침공했다”는 소식을 다급하게 전했다. 하지만 외국인 [[사제]]들과 [[수도자]]들은 성당과 신자들을 지키기 위하여, 외국으로 피신하지 않고 한국에 남았다. 공베르 신부 형제는 인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북한군에 체포되어 납북되어, 일명 [[죽음의 행진]]이라 불리는 대열에 끌려가게 된다. 북한 인민군은 포로로 잡은 종교인들을 [[평양]]으로 옮겼다가, 전세가 자신들에게 불리해지자 [[평안북도]] [[강계군]][* 오늘날 [[북한/행정구역]]상 [[자강도]] [[만포시]].]의 고산진 수용소까지 끌고 간다.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길고 험한 길을 행진한 70대 고령의 공베르 신부 형제는 병을 얻었고, 형 앙투안 신부가 1950년 11월 12일에 먼저 사망했으며, 다음날인 11월 13일 동생 줄리앙 신부도 뒤따르듯 사망했다. 현재 [[한국천주교회]]에서는 [[교황청]]에 공베르 신부 형제의 [[시복]]([[諡]][[福]])을 청원 중에 있으며, 2020년 [[안법고등학교]]에서는 [[천주교 수원교구]] [[이성효]] 리노 보좌주교의 주례로 공베르 신부 형제의 순교 70주년 기념행사를 거행했다.[[https://www.catholictimes.org/article/article_view.php?aid=349906&acid=178|#]] [[분류:프랑스의 가톨릭 신부]][[분류:프랑스의 가톨릭 선교사]][[분류:파리외방전교회 회원]][[분류:광암학원]][[분류:1875년 출생]][[분류:1950년 사망]][[분류:납북자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